인천의 품격 7편 한글점자 창시자 송암 박두성
일제 탄압 속 한글 점자 훈맹정음 비밀 연구·반포
책·신문 점역해 시각장애인에게 우편으로 대여

인천투데이=이형우 기자 l “눈이 사람 노릇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과 두뇌가 사람 구실을 하는 것이니 맹인들을 방안에 가두지 말고 가르쳐야 한다”

시각장애인에게 세종대왕이라 불리는 송암 박두성 선생의 말이다. 한 평생 맹인 교육을 위해 살아온 송암은 일본제국주의 탄압 속에서 조선말을 지켜야 한다는 신념과 맹인을 교육해야 한다는 의지로 한글 점자 훈맹정음을 만들고 전파했다.

인천 미추홀구 학익동에 위치한 송암 박두성 기념관은 박두성의 유품과 사진을 전시하고 있다. 아래는 <인천투데이>가 기념관을 방문해 송암 박두성 선생의 이야기를 듣고 정리한 글이다. <편집자 주>

송암의 외손녀 유명애 작가가 그린 송암 박두성.
송암의 외손녀 유명애 작가가 그린 송암 박두성.

송암은 1888년 4월 26일 인천 강화군 교동면 상용리에서 9남매 중 첫째로 태어났다. 그는 8살이 되던 해 보창학교를 입학해 다녔다.

송암은 교사 양성을 위한 최초 근대식 학교인 한성사범학교(서울 경기고등학교)에 입학해 교사를 꿈꿨다. 그는 졸업 후 어의동보통학교(서울 효제초등학교)에서 교직 생활을 시작했다.

송암이라는 호는 임시정부 국무총리로 알려진 성재 이동휘가 1911년 암자의 소나무처럼 절개를 굽히지 말라는 의미로 지어줬다. 송암은 그 뜻을 지키고자 남이 하지 않는 일에 평생을 바치기로 결심했다.

일제는 1913년 조선인 유화정책으로 조선총독부에 제생원(특수학교)을 설치했다. 송암은 제생원 맹아부(서울맹학교) 교사로 발령받았다.

교육 기본 자료인 점자 교과서도 없는 교육현장에서 송암은 답답함을 느꼈다. 그는 점자 교과서 필요성을 주창했고, 1913년 8월 점자 교과서를 출판했다. 비록 일본어이긴 했지만 한국 최초 점자 교과서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일제는 탄압 강도를 높이고 조선어 과목을 없애려 했다. 송암이 근무한 제생원에도 조선어 과목을 폐지하려하자 송암이 항의했고 끝내 폐지를 막아냈다.

송암은 “눈이 없다고 사람을 통째로 버릴수 있겠는가? 앞 못 보는 사람에게 모국어를 안 가르치면 이중 불구가 돼 생활을 못하는 것이다. 실명한 이들에게 조선말까지 빼앗는다면 눈 먼 데다 벙어리까지 되란 말인가”라고 항의했다.

송암이 사용한 제판기.
송암이 사용한 제판기.

송암은 한글 점자가 없는 것을 안타까워했다. 그는 1920년 한글 점자 연구를 시작했고 1923년 제자인 이종덕, 전태환 등 8명과 함께 ‘조선어 점자 연구위원회(육화사)'를 비밀리에 조직했다.

수많은 시행착오와 연구 끝에 송암은 한글 점자를 완성했다. 그는 한글이 반포된 양력 11월 4일(조선왕조실록 기록으로 음력 9월29일)에 맞춰 1926년 11월 4일 훈맹정음을 발표하고 국내 맹인들에게 우편으로 발송했다.

제생원을 그만둔 송암은 1936년 인천 영화학교 교장으로 부임했다. 이후 1940년 조선맹아사업협회를 조직하고 점자통신교육을 시행하는 등 맹인 교육활동을 지속했다.

송암은 성경, 명심보감, 천자문, 불쌍한동무(최남선), 이솝우화 등의 책을 점역했다. 또 뉴스를 점역해 맹인들이 세상 소식을 알 수 있게 했다. 또 송암은 맹인도 계산을 할 줄 알아야 한다며 맹인들에게 주산도 가르쳤다.

송암은 해방 후 국내 맹인에게 훈맹정음을 보급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했다. 송암은 집 대문에 태극기를 그렸다. 송암의 집을 찾는 맹인이 주변 사람들에게 태극기가 그려진 집을 물으면 쉽게 찾아줄 거라는 의도였다.

특히, 송암은 점자책을 우편으로 주고받는 데 맹인들의 부담이 크다며 우정국(우체국)장에게 우편료 감면을 요청했다. 우정국장은 처음에 반대했지만 송암의 설득 끝에 우편료를 감면했다. 현재도 우체국은 점자책을 무료 배송하고 있다.

평생 맹인 교육에 힘쓴 송암은 1963년 8월 25일 점자책은 쌓지 말고 꽂아서 보관하라는 말을 남기고 향년 76세로 세상을 떠났다. 점자책을 쌓아 보관하면 점자가 무너질 수 있으니 조심하라는 말을 마지막 말로 남겼다. 점자에 대한 그의 진심어린 마음을 느낄수 있는 대목이다.

왼쪽 송암 박두성 흉상, 오른쪽 시각장애인이 만져볼 수 있게 만든 모형 흉상 
왼쪽 송암 박두성 흉상, 오른쪽 시각장애인이 만져볼 수 있게 만든 모형 흉상 

정부는 1992년 송암의 공로를 인정해 은관 문화훈장을 추서했다. 문화관광부는 2002년 한국문화예술진흥원 4월의 문화인물로 선정했다.

또 지난해 12월 송암의 유품은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됐다. 송암이 생전에 사용한 제판기와 점자 타자기 등 48점은 등록문화재 제800-1호로, 훈맹정음 점자표와 해설 원고는 800-2호로 지정됐다.

문화재청은 지난 4월 16일부터 7월 18일까지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국가등록문화재 20주년 특별 전시회를 열고 송암의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11월 4일은 한글 점자의 날이다. 매년 이날 문화체육관광부 주관 기념식이 열리고 있다. 지난해 점자 사용 활성화 방안을 주제로 학술대회도 열렸다.

인천시는 지난해 강화군 교동면에 위치한 송암의 생가 터를 복원하는 사업을 시작했다. 또 이곳에서 송암 탄생 133주년 기념행사를 열었다. 강화에서 송암의 정신이 살아나고 있다.

다만 송암의 육체는 남동구 수산동에 위치한 공동묘지에 안장됐다. 송암을 보기 위해선 사유지로 막힌 영역 울타리를 돌아 숲 속 숨은 길을 찾아 방문해야 한다. 국가적 위인이 평범한 공동묘지에 안장된 것은 아쉬운 대목이다.

저작권자 © 인천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