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기 송암예술아카데미 ‘인천 근현대 예술인의 삶’
1편 조우성 전 인천시립박물관장 '우현 고유섭' 강의

인천투데이=이형우 기자 l 한국의 수많은 미술 작품들은 엄혹한 일제강점기를 어떻게 견뎌냈을까. 일생을 바쳐 과거 수많은 한국 미술 작품들을 수집·연구하고 정리한 사람이 있다. 한국미술사를 국내 최초로 연구한 인천의 우현 고유섭 선생이다.

조우성 전 인천시립박물관장이 송암미술관이 주관한 송암예술아카데미 ‘인천 근현대 예술인의 삶’에 출연해 한국 박물관과 미술 평론의 거장 우현 고유섭 선생의 삶을 얘기했다. 아래는 강의 내용 일부를 정리한 글이다. <편집자 주>  

우현 고유섭.

“14살 3·1운동 참가해 만세 외친 우현, 민족 성향 강했다”

인천이 1883년 개항한 후 제물포는 그야말로 ‘신도시’였다. 신문물이 들어오고 그에 맞는 새로운 직업이 생기며 당시 인구 7000여명에 불과했던 제물포는 하루가 다르게 변해갔다. 새로운 문화가 태동하는 환경 속에서 우현 고유섭은 태어났다.

우현은 1905년 인천시 중구 용동에서 태어났다. 10살이 되던 해 인천공립보통학교(현 창영초등학교)에 입학해 우수한 성적으로 학교를 다녔다.

우현은 힘든 소년기를 보냈다. 우현은 어린 나이에 편도선염, 임파선종 등 수차례 병치레를 겪어야 했다.

인천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할 무렵 우현의 부친은 외도를 저지르고 모친은 집에서 쫒겨나 우현은 부모가 아닌 삼촌들의 보살핌 속에서 지냈다. 우현은 부모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삼촌 밑에서 자랐다. 다행히 뛰어난 삼촌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육체적으로 힘들었던 그였지만 정신은 달랐다. 우현은 어렸을 때부터 민족 성향이 강했다. 3·1운동이 대대적으로 일어나자 우현은 태극기를 직접 그려 함께 만세운동에 나섰다. 14살이란 나이에 태극기를 흔들며 동네를 돌다가 체포돼 3일간 유치장에 갇혔다. 어린 나이에도 강한 민족정신을 보여줬다.

경성제국대학 조선인 모임.

“우현을 한국 미술사학의 '태두' 또는 '원류'라고 불렀어요”

1920년 경성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한 우현은 ‘한용단’ 문예부에서 활동하며 문학에 견문을 넓혔다.

우현은 평소 세계적인 명작을 즐겨 읽었고 동아일보에 시조 ‘경인팔경’, 문우(문학잡지)에 ‘해변에 살기’ 조광(잡지)에 ‘애상의 청춘일기’를 발표하는 등 문학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우현은 문학에서 미술로 점차 눈길을 돌렸다. 1927년 경성제국대학(현 서울대학교) 법문학부 철학과에 입학해 미학·미술사 전공을 선택했다. 동기생 이희승 국어학자 박사가 왜 힘든 미학을 전공하려고 하냐고 물었더니 우현은 “우리의 미를 연구하고 싶어서”라고 대답했다.

지금도 미술만을 전공으로 살아가긴 어렵다. 우현은 그 엄혹한 시기에도 많은 것을 포기하고 미술을 선택했다.

우현은 우리 미술 작품들이 일본인의 눈으로 보고 해석되는 것을 안타까워했다. 조선인의 눈으로 조선 작품을 해석해야 한다는 신념을 품고 있었다. 신념을 이루기 위해 그는 "우리 민족혼을 미술로 나타내겠다"는 정신으로 미학에 뛰어들었다.

1933년 우현은 개성부립박물관 관장에 부임해 본격적으로 연구성과를 내기 시작한다. 그는 고려청자의 유래를 조사하고 금강산 유정사의 불상 53개를 모두 조사하는 등 연구활동을 꾸준히 지속했다. 11년 동안 개성부립박물관장으로 부임하며 논문 150여 편을 발표했다.

어느 학자도 우현 선생에 필적하는 연구 업적을 남긴 사람이 없다. 그만큼 독보적인 존재였다. 또한 우현은 우리 시각으로 우리 미술을 분석한 최초의 학자다.

우현 추모비.

“인천 사람이 인천 사람을 기린 최초의 위인은 우현이에요”

우현의 평생 소원은 ‘조선미술사’ 저작이었다. 하지만 저술을 못한채 1944년 간경화증으로 세상을 작고한다. ‘한국 미술사학의 원류’라고 불리던 그가 불혹이란 문턱을 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1974년 우현 사후 30년이 되는 날, 인천 지역 인사들이 모여 우현을 기리기 위해 옛 인천시립박물관 앞뜰(자유공원 내)에 모여 추모비를 제막했다. 또한 인천시는 우현의 생가 앞을 지나는 큰 길을 ‘우현대로’로 명명했다.

1992년 새얼문화재단은 우현을 제1회 새얼문화대상 수상자로 선정하고 그의 좌상을 인천시립박물관에 기증했다.

1993년 서울 인사동에 위치한 고서점 통문관의 이겸로 사장은 우현을 몰랐다. 친분이 있던 검여 유희강이 우현의 이야기 보따리를 풀었다. 이를 들은 이겸로 사장은 감동을 받고 관련 원고를 모아 ‘우현 고유섭 전집’ 4권 출간했다. 국내 최초 우현 전집이였다.

2005년 도서출판사 열화당은 우현의 제자 진홍섭, 황수영 국립중앙박문관 관장 등과 함께 내용을 보충해 우현 전집 10권을 발간했다.

또한 인천문화재단은 매년 인천문화예술 발전에 기여한 문화예술인에게 '우현예술상'을 시상하고 있다. 이처럼 한국 미술의 과거와 현재를 이어준 우현의 정신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우현 좌상 기념사진.

“우현과 석남은 서로를 선택했어요”

우현 고유섭과 석남 이경성은 서로를 선택했다. 둘이 만난 적은 없지만 한국 미학을 지키려는 뜻이 서로를 이끌었다.

석남이 동경에서 미술 공부할 적에 우현의 처남을 통해 편지를 주고받았다. 우현과 석남은 만난 적이 없지만 고향 선후배로서, 미학에 종사하는 사람으로서 편지를 주고받으며 사이가 돈독해졌다.

석남은 우리나라에 박물관인이 필요하다는 우현의 편지를 보고 박물관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하지만 돌연 우현이 작고했다. 석남은 우현의 뜻을 이어 박물관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국내 최초 공립박물관인 인천시립박물관이 탄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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