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기 송암예술아카데미 ‘인천 근현대 예술인의 삶’
2편 조우성 전 인천시립박물관장 ‘석남 이경성’ 강의

인천투데이=이형우 기자 l 우현 고유섭 선생은 일제강점기 속에서 우리 미술 작품을 지켰다. 우현은 비록 해방을 못보고 세상을 떴지만, 그의 정신을 계승한 인물이 해방 직후 국내 최초 공립박물관을 개관한다.

바로 1세대 미술 평론가로 국내 미술평론을 개척한 선구자이자, 최초 공립박물관을 개관한 석남 이경성 선생이다.

조우성 전 인천시립박물관장이 송암미술관이 주관한 송암예술아카데미 ‘인천 근현대 예술인의 삶’에 출연해 한국 박물관과 미술 평론의 거장 석남 이경성 선생의 삶을 얘기했다. 아래는 강의 내용 일부를 정리한 글이다. <편집자 주>

인천시립박물관 기념사진. 윗줄 가운데가 석남이다.
인천시립박물관 기념사진. 윗줄 가운데가 석남이다.

“석남, 판검사를 포기하고 미술인을 선택하다”

석남은 1919년 인천시 중구 경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우현과 같은 창영초등학교를 다녔다. 이후 서울 상문학교, 일본 동경의 야간학교를 거쳐 와세다 대학 법학과에 입학했다.

석남의 부친은 법관이 되길 기대했지만 석남은 다른 마음을 품고 있었다. 법률 공부를 안하면 학비를 대줄 수 없다는 부친의 압박에도 그는 예술가의 꿈을 키웠다. 그는 늘 시를 쓰고 소설을 읽으며 그림을 그렸다.

1939년 2월 석남의 인생이 바뀌는 사건이 발생했다. 석남은 동경에 자리 잡기 위해 함께 지낼 장분석이란 법학과 학생과 약속을 잡았다.

막상 동경역에 나가보니 장분석 학생은 없고 다른 학생이 대신 와있었다. 결국 석남은 그 학생을 따라 하숙집을 들어갔다. 그 학생은 다마미술학교를 다닌 인천 출신 유학생인 이남수였다.

평소 예술에 관심이 많았던 석남의 인생은 이남수와 같은 하숙집에서 지내며 본격적인 예술 활동을 시작했다. 약속 장소에 다른 사람이 나온 게 삶의 전환점이 됐다. 석남은 다른 미술 전공 학생들과도 어울리며 미술 지식과 관심을 넓혀갔다.

석남 이경성.
석남 이경성.

“석남과 우현은 만난 적 없지만 뜻은 통하고 있었어요”

어느 날 석남을 본 교수가 왜 이런 어려운 시기에 미술평론을 하느냐고 물었다. 석남은 우현과 비슷하게 “조선사람으로서 조선의 미술을 평론하고 싶다”도 답했다. 우현과 석남은 만난 적이 없지만 뜻은 이미 통하고 있었다.

석남은 우현의 처남인 박상래를 통해 편지를 주고받았다. 책이 필요하다는 우현의 부탁을 받은 석남은 동경 간다거리에서 책을 구했다. 석남은 그런 우현의 모습을 보고 점점 우현을 존경하기 시작한다.

[인천의품격] 한국 박물관의 길을 연 우현 고유섭

석남은 ‘황해문화 제2호 원로와의 만남’에서 “고향 선배이신 고유섭 선생님을 직접 뵙진 못했고 편지를 주고받았어요. 고유섭 선생님이 우리나라에도 박물관이 필요하다는 말씀에 큰 감화를 받아 박물관을 (조성) 하기로 작정했어요”라고 말했다.

석남 이경성.
석남 이경성.

“거지같이 살았지만 정신만은 귀족이였다”

석남은 와세다 대학 졸업시험을 치렀지만 어머니가 위독해 졸업식을 못한 채 귀국했다. 장남인 그는 어머니 장례로 집에 머물렀지만 마음은 동경에 가있었다. 그는 고등문관 시험을 치르기 위해 간다고 거짓말하며 1942년 가을 동경으로 떠난다.

석남은 동경에서 배인철 시인과 조규봉 조각가를 만나 함께 지낸다. 같은 인천 출신인 3명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예술을 떠들었다고 한다. 성한 옷과 신발이 부족해 아침에 먼저 입고 나가면 뒷 사람은 허름한 옷을 입어야 할 정도로 세 명은 경제적으로 어려운 생활을 했다.

하지만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이 3명은 예술로 똘똘 뭉쳤다. 석남은 이 시기 미술평론가가 되겠다는 마음을 굳혔다. 유명 미술평론가가 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석남은 회고록에 “생활은 거지와 진배없지만 정신은 늘 귀족이었다. 항상 미술을 이야기하고 문학과 음악, 정치를 논했다”며 그 시절을 추억했다. 물질적으로 빈곤했을지 몰라도 정신적으로 가장 빛나는 시절이었다고 석남은 회상했다.

한국 최초 서양식 건물인 세창양행 직원 사택. 이곳에 인천시립박물관이 들어선다.
한국 최초 서양식 건물인 세창양행 직원 사택. 이곳에 인천시립박물관이 들어선다.

“석남은 국내 1세대 미술평론가”

1945년 광복이 되자 석남은 인천시 중구 해안동 옛 영국영사관 건물에 ‘우리예술관’을 개관한다. 우리예술관엔 집필실, 음악실이 있었고 무용공연과 강연회도 열렸다. 당시 사정으로 상상조차 힘든 피아노도 있었다.

인천군정관 험벨트의 제안으로 인천시립박물관 개관을 준비했다. 인천박물관은 자유공원(각국공원) 내 최초 서양식 건물인 세창양행 직원 사택 자리에 자리잡았다. 그렇게 1946년 4월 1일 마침내 국내 최초 공립박물관이 문을 열었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석남은 시립박물관을 지켰다. 그는 세칭 ‘비도강파’가 됐다. 북한군이 건물을 쓰겠다고 하자 석남은 유물을 모두 다른 곳으로 옮겼다. 인천상륙작전 당시 함포 사격으로 박물관은 건물기둥만 남은 채 소진됐으나 석남의 결정으로 유물을 지킬 수 있었다.

1951년 중국인민해방군의 한국전쟁 참전에 따른 1·4후퇴 때 석남은 문화재를 싣고 부산으로 피난했다.

그는 문화예술계 인사들이 활동하던 광복동에서 인천시립박물관 관장의 직함으로 미술평론활동을 시작했다. 1951년 2월 부산에서 열린 전시미술전의 비평문을 ‘우울한 오후’라는 제목으로 발표했다. 이는 첫 번째 공식 비평 활동이였다.

전쟁이 끝난 후 석남은 인천으로 돌아와 비평 활동을 계속했다. 그는 인천박물관을 제물포구락부 자리로 이전하고 유물을 옮겼다. 석남은 미술비평으로 유명해져 홍익대학교와 이화여자대학교에서 분필을 잡는다.

제물포구락부에 자리잡은 인천시립미술관.
제물포구락부에 자리잡은 인천시립미술관.

“석남, 한국 현대 미술관의 선구자”

석남은 홍익대 교수로 20여년간 재직하며 한국 현대미술전의 선구자 역할을 맡는다. 그는 홍익대 미술사학과 초대 학과장을 맡고, 현대미술관을 창설해 관장을 맡았다.

또 한국 국전 운영위원으로 활동할 때, 국전이 부패하고 신인을 발굴하지 못한다며 국전 폐지를 주장했고 실제로 폐지됐다. 이후 석남은 석남미술재단을 만들어 신인 예술인에게 매년 석남미술상을 수여했다.

석남은 국립현대미술관 관장, 워커힐미술관 관장, 상파울로 비엔날레 한국대표 등 많은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프랑스현대미술전, 와이즈만 콜렉션 등 굵직굵직한 현대 미술 전시회를 열었다.

인천시립박물관에 전시된 청·일전쟁, 러·일전쟁 유물.
인천시립박물관에 전시된 청·일전쟁, 러·일전쟁 유물.

석남은 인천을 사랑했다. 현대미술관 관장을 하기 전까지 인천에 살며 출·퇴근을 했다. 석남이라는 아호도 인천 서구 석남동과 관련이 있다.

동정 박세림 집에 모여 차를 마시다가 ‘석남’을 쓰인 현판을 보고 사람들이 석남이라고 짓자고 제안했다. 석남은 자신의 선산이 석남동에 있는 것을 떠올리며 제안을 수락해 아호가 석남이 됐다.

2009년 석남이 미국에서 작고하자 새얼문화재단 지용택 회장이 주도해 인천시립박물관에서 추모제를 열었다. 또 좌상과 흉상을 만들어 인천시립박물관에 기증했다.

우현의 뜻을 이어 1세대 미술평론가로 활동하고 최초 국립박물관을 개관한 석남. “예술은 인위적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생활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야 한다”는 석남의 마음은 현재도 박물관 속에 녹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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