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수대에서 SNS까지, 인천언론을 중심으로 (43)

인천투데이=전영우 객원논설위원│

인천투데이는 매주 인천미디어변천사를 연재합니다. 원시 부락을 이루고 살던 시절 연기와 불을 피워 위급한 소식을 알리는 봉수대(烽燧臺)에서부터 현재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이르기까지 미디어(매체) 변천사를 기록합니다.

인천 언론을 중심으로 미디어 변천사를 정리해 인천 언론의 발달에 이바지하고자 합니다. 연재글을 쓰는 전영우 박사는 인천대학교 신문방송학과 교수로 일했습니다.<편집자주>

일제 강점기 인천 언론인들의 활동과 인천의 여러 사정에 대해 비교적 소상하게 알 수 있는 것은 기록이 남아있기 때문인데, 특히 고일(高逸)의 인천석금은 당시 인천 언론인을 비롯한 여러 인물들의 활동과 사회상을 잘 정리해 놓고 있다.

고일은 1954년 4월부터 ‘주간인천’에 인천석금이라는 제목으로 인천의 사회상을 정리한 글을 1년여간 연재했고, 1955년에 책으로 엮어 출판했다. 인천석금은 곧 절판돼 구하기 어려운 책이 됐는데, 2001년 해반문화사랑회가 현대의 문체로 교정본을 발행했고, 인천 향토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역할을 하고 있다.

인천의 대표적 언론인인 고일은 1903년 5월 6일 서울 마포에서 태어났는데, 생후 4개월만인 1903년 9월에 인천으로 와서 평생을 인천인으로 살았다. 고일의 본명은 ‘희선(羲璇)’이고 호는 ‘산재(汕哉)’이다.

인천의 대표적 언론인 고일.(사진출처 인천시립박물관)
인천의 대표적 언론인 고일.(사진출처 인천시립박물관)

고일은 언론인으로서 인천에 남긴 발자국 뿐 아니라, 인천 사회 각계각층에 영향을 미친 인천 근대사의 산증인이었다. 기자로서 취재활동은 물론이고, 일제에 항거한 항일운동가였고, 인천의 청년운동을 위해 노력한 활동가였으며, 문화·예술 그리고 노동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인천 사회를 이끌었던 인물이었다.

인천에 정착한 고일은 1915년에 창영초등학교 전신인 인천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18년 서울 양정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 당시 인천에는 한국 학생들이 진학할 마땅한 고등교육기관이 부족해 부득이하게 서울로 통학하는 학생이 많았는데 이들 통학생들을 중심으로 ‘경인기차통학생회’가 결성됐다. 곽상훈을 중심으로 결성된 ‘경인기차통학생회’의 구성원들은 훗날 인천을 이끌어가는 주요 인물들이 됐다.

고일은 이 친목회의 문예부에서 활동하면서 우현 고유섭, 동아일보 일장기 말살 사건의 이길용, 조선일보 기자 송건우, 임영균 등과 교우하며 ‘제물포’를 발행하기도 했다. 경인기차통학생회 문예부의 활동은 인천에서 현대문학이 태동한 시초라고 인정받고 있다. 또한 통학생들의 친목 모임을 뛰어넘는 민족 문학 운동이었다.

이외에도 고일은 곽상훈과 함께 우리나라 최초의 야구단인 한용단을 창단했고, 독립만세운동에도 가담했다. ‘신정회(新正會)’를 창단하고, 기관지인 ‘정의(正義)’를 발행했다가 창간호 전부를 압수당하면서 일제로부터 요주의 인물로 감시당하고 탄압을 받았다.

1923년 양정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고일은 연천공립보통학교에서 교사로 근무를 시작하지만, 일본인 교장이 한국 학생을 도둑으로 취급한 것에 분개해 교장의 뺨을 때리고, 6개월 만에 교사직을 그만둔다.

인천으로 돌아온 고일은 조선일보 인천지국 기자로 취직해 신문기자로 활동했다. 1924년 3월 31일자로 시대일보 인천지국 기자로 자리를 옮긴 고일은 신문기자로서뿐 아니라 다양한 분야의 사회운동가로서 활발하게 활동했다.

고일은 당시를 자신의 전성기라고 인천석금에서 밝혔는데 각종 사회 운동에 앞장섰고, 기자로서 강자를 견제하고 약자를 돕는 기개가 높았던 시절이었다고 스스로 평가하고 있다. 고일은 일제 치하에서 이런저런 활동을 이유로 지속적으로 유치장을 들락거렸고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4년간 구금되기도 했다.

당시 인천은 일자리를 찾아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노동자들의 도시였고, 이들 노동자들의 관리를 맡은 일본인들과 종종 마찰을 빚었다. 한국인 노동자들을 대하는 일본인 관리자들은 인권 침해를 일삼았고 따라서 한국인 노동자와 일본인 관리자들 사이에 갈등은 상존하는 문제였다.

고일을 비롯한 한국인 기자들은 이런 실상을 취재해 보도했고, 인천석금에서 고일은 자신이 취재해 사회적 문제로 발전한 가등정미소 사건을 자랑스럽게 기술하고 있다.

일제 치하 인천에는 정미소, 성냥공장, 방직공장 등 공장이 많았고 이들 공장 중 하나인 가등정미소에서 일본인 감독이 한국인 여공을 폭행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고일은 이를 취재해 보도했는데, 이 사건은 인천 전역에서 동맹파업으로 이어지는 민족 운동으로 발전했고, 이는 인천 노동운동의 효시로 인정받고 있다. 고일의 기사로 인해 인천 노동운동이 시작됐다고 볼 수 있으니, 고일이 이 기사에 그렇게 자부심을 보인 것은 당연한 일이다.

고일은 1931년 일어난 ‘만보산 사건’, 신간회 운동 등 일련의 사건으로 일본 경찰에게 쫓기게 되는데, 결국 1932년 7월에 한반도를 떠나 북만주로 망명을 한다. 만주에서 6년여 동안 망명생활을 하던 고일은, 1938년 일본 정부의 통제를 받는 ‘요시찰인’으로 귀국한다.

귀국을 했지만 일본의 감시와 통제로 생활고를 겪었고, 호구지책으로 인천부청의 임시사원으로 취직해 해방될 때까지 근무했다.

고일은 1959년 6월 29일자 주간인천에 실은 글에서 “요시찰인으로 출입왕래가 부자유, 호신책으로 여러 친지 등의 권유로 인천부촉탁으로 있었다. 장년기를 무능비굴하게 보냈으니 30년의 시간을 상실했다”고 밝히며 자신이 일본 치하의 인천부청(지금의 인천시청)에서 근무했던 것을 자책하는 심정을 드러냈다.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택한 일이었지만, 일제에 항거해 박해를 받고 옥고를 치렀으며 망명생활까지 했던 사람으로서 자괴감을 심하게 느꼈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고일은 해방 이후 1954년부터 ‘주간인천’ 주필로 재직하며 칼럼 ‘인천석금’을 1년여에 걸쳐 연재했다. 인천석금은 인천의 경제와 사회상은 물론이고 문화와 역사를 아우르는 칼럼으로 당대 민족 지식인의 눈으로 인천을 기록한 글이기에 특히 인천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이다.

고일은 말년에 인천상고사와 인천인물사를 집필하려고 했으나 지병 악화로 결실을 맺지 못하고 1975년 72세의 나이로 작고했다.

고일이 왕성하게 활동했던 시기는 일제의 온갖 탄압이 극심했던 시절이었다. 당시와 비교하면 현재의 기자들은 비교할 수 없이 자유로운 환경과 조건에서 언론자유를 만끽하고 있는데, 오히려 권력과 자본에 부역하는 기사를 양산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일말의 가책이나 자기 성찰도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세월이 흐르고 사회가 발전하고 성숙했으니 기자정신도 더불어 발전하고 꼿꼿이 서야 정상일 텐데, 오히려 자발적 부역을 일삼고 있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고일은 기자정신 관련 글도 남겼는데, 요즘 기자들이 한번 곱씹어 볼 문장이다.

“잘 살고 잘 지내려거든 신문기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빈한이 도골(到骨)하더라도 억강부약(抑强扶弱) 정의만을 위해 목숨을 바칠 인물이라면 기자가 되라. 기자의 자랑은 정의의 사도이며, 국민의 벗이며, 시대의 경고자와 역사의 추진자로서 자부하는데 있다. ‘있는자’의 노예가 될 수 없고, 권력층의 수족이 될 수는 없다.”

저작권자 © 인천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